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두 개의 입장, 한 명의 숙녀
생각 | 2007. 4. 13. 01:41
awaiting

늦은 저녁, 하루를 게을리 보내버린 탓에 해가 진 이후에야 외출하고픈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선다.

상가의 불빛에 비친 길거리에 너울대는 그림자들 사이로, 마음이 풀어지면 금세 게을러지는 습성이 몸에 밴 자신의 한심함에 한숨을 쉬며, 그래도 나에게 있어 하루의 생활을 했다라는 의미인 신문의 구독을 위해 편의점에 들른다.

저녁끼니를 간단히 때울 곳을 생각하다,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걸음을 옮긴다.

패스트푸드는 좋아하지 않지만, 아마도 내겐 그 매장의 한적한 2층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이 필요한 것이겠지, 라는 생각을 하며 주문을 잘못들은 점원이 내놓은, 주문한 적 없는 햄버거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간다.

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은 후, 앞에 앉은 여성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열독하고 있는, 대학의 전공서적과 테이블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흘낏 살펴본다.

곧 대학의 시험기간이니 그녀는 강의교재에 열심인 것이겠지, 라고 생각하며 테이블 위의 필통이나 필기구, 이미 다 마셔버린 주스의 용기 따위로 눈길을 옮기다 쌓여 있는 두 권의 책 위로 보이는 주황색의 물체에 시선이 꽃힌다.

그 주황색의 물체는 최근 출시된 신형 면도기의 포장을 벗기지 않은 패키지였다.

아, 그렇군.

그녀는 이 곳에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.
그녀는 이 곳에 그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다.

그가 도착하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, 학생인 그녀로선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한가롭게 창 밖에 시선을 던질 여유따윈 없는 것이겠지.

하지만 그 시간동안 학업만으로 마음속까지 채우지 않았기에, 가방속에 넣어놔도 충분할 그에게 건넬 선물을 이리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것이다.

아마도 그녀는, 오늘 그를 만나러 오기 전에 들렀던 어딘가의 상점에서, 그 신형 면도기를 보는 순간 그를 생각했으리라.

충동적으로 구매해버린 그를 위한 선물은, 테이블 위에, 다시 대학교재 두 권의 위에 올려져 그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그녀에게 마음속 한 켠의 즐거움으로 자리잡고 있음을, 이리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겠지.

아닌 척 책에 고개 파묻고 있어도 소용없다구.
정말이지 사랑에 빠진 아가씨들이란 어쩔 수 없구만.
 
그런 따위의 생각을 하며, 학생으로서의 입장과 연인으로서의 입장 양자를 동시에 만족시키고 있는 그 화장기없는 숙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.

조금 전 까지의 한심한 기분은 어디론가 날아간 채, 피식 웃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며 밤 거리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.


 
 
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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